4월 11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역사적 의의를 기리기 위하여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이다. 이전에는4월 13일로 의의를 기념해 오다가 지난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변경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은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인 1919년 4월 11일을 말한다. 이날은 임시정부의 설립 주체인 임시의정원이 1919년 4월 10일 밤 10시부터 10개조로 이루어진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철야 심의한 후, 4월 11일 오전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헌법을 제정 및 발포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해 임시정부를 수립한 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은 1989년까지는 한국독립유공자협회에서 기념식을 주관하다 1989년 12월 30일에 국가 기념일이 되었다. 이후 1990년 기념식부터는 정부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바뀌었다. 2018년까지는 4월 13일에 시행됐으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2019년부터는 4월 11일로 변경됐다. 날짜의 변경 이유는 역사학계에서 발견한 추가 자료를 비롯해 학계의 전반적인 의견을 반영하여 변경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행사는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리며, 광복회장의 임시정부 수립 경과보고, 국무총리 기념사, 기념 축시 낭송의 순서로 진행된다.

정부는 1989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로 정하고, 이듬해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을 시행해 왔다. 이는 국사편찬위원회가 1969년 발간한 <일제치하 36년사>에 기초를 둔 결정으로, 이 책은 1919년 편찬된 <한일관계사료집>과 1932년 <조선민족운동연감> 자료를 근거로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일이 1919년 4월 11일이며 다양한 자료에서 임시정부가 이날 기념식을 거행했다는 점을 바탕으로 기념일의 날짜 정정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이어졌다. 한국국민당의 기관지 <한민>에 '4월 11일이 임시헌장을 발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성립한 기념일'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 1920년 독립운동가 김병조의 <독립운동사략>,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신문 <시사신보>에서도 4월 11일을 수립일로 언급했다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2018년 4월 13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제99주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에서, 임시정부 수립일을 4월 13일이 아니라 국호와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내각을 구성한 4월 11일로 기념해야 한다는 역사학계의 의견을 존중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2019년부터 임시정부 수립 기념일을 4월 13일에서 4월 11일로 변경한다고 밝혔다.

출처 : 이미지투데이
출처 : 이미지투데이(2020년 4월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 101주년 되는 날이다.)

임시정부 수립일 기념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가족, 그 후손들의 삶을 되짚어 보자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2019년 국가보훈처에서 발표한 보훈대상자 현황에서 독립유공자로 등록된 분들은 8,036명이다. 하지만 일신과 가문의 행복은 접어두고 오로지 항일투쟁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가들의 가족과 후손은 전국, 전세계로 흩어졌으며 가산을 빼앗겨 집안이 몰락한 경우가 대부분이며 국가에서의 보상도 ‘독립운동’에 비하며 턱없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출처:(e-나라지표/국가보훈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는 8,036명이다.)
출처:(e-나라지표/국가보훈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는 8,036명이다.)

그러나 모든 독립유공자, 그의 가족과 후손들이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는 것만은 아니다. 독립유공자 가족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지고 사회적으로 대우받은 유족은 백범 김구 선생의 후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아들 김신씨는 공군참모총장·교통부 장관을, 그의 장남 김진씨는 주택공사 사장을 지냈다. 차남 김양씨는 상하이 총영사를 거쳐 현재 국가보훈처장, 3남 김휘씨는 광고대행사 대표이며 외동딸 김미씨는 빙그레 김호연 회장의 부인이다.

반면 백범 선생과 비슷한 시기에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유가족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1936년 뤼순감옥에서 서거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 신수범씨는 광복 후에 오히려 고통스러운 생활을 겪었다. 신채호 선생이 임시정부 초기에 이승만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신의 위협까지 받게 되어 넝마주이, 부두의 노동자로 떠돌이 생활을 전전하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이후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 특히 신채호 선생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신고를 거부하고 망명길에 올라 아직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지 못한 무국적자 신분이었다가 2008년 국적을 회복했다. 신채호 선생 명의의 땅과 집도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해 소송 진행중인 상황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치”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박대이다.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이장무 前서울대 총장/한국과학기술원 이사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그리고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김병만 전 동아일보 회장, 前 중앙일보/JTBC 홍석현 회장 등 현재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이 유명인사들에게는 조상이 친일파란 공통점도 갖고 있다. 조상이 친일파라고 하여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까지 연좌제로 ‘나쁜’ 사람임을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친일 행적으로 현재까지 가산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나라의 독립만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 및 그의 가족과 후손들의 현재를 생각해보는 ‘임시정부수립일’ 이었으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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