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김병조)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독립운동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 김병조)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맞이하여 사이드뷰의 시선에 포착된 인물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인 김병조입니다.

1877년 1월 10일 평북 정주군 동주면 봉명동에서 태어난 김병조의 본관은 금령(金寧)이고, 자는 윤석(允錫)이며, 호는 일재(一齋)입니다.

김병조는 넉지 않은 농가에서 태어났지만 남다른 재주를 갖고 있던 그는 부친의 후원 아래 6세 때부터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고, 20세가 되던 해부터는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 서당을 열기도 하였으며, 1913년 봄 평양장로회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6월 졸업하고 그해 8월 목사 안수(按手)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김병조는 1919년 2월 중순 이승훈에게 독립운동 계획을 듣고 참여를 결정하면서 모든 절차를 그에게 일임하였습니다.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들이 모여 ‘3 · 1 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 참여하지 않고 ‘격고아한동포문’를 만들어 평안북도 각지에 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압록강을 건너 단둥을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이틀 후인 4월 13일 상하이에 도착하였습니다.

그해 4월 말에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5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시사진술서’를 발표하고 국제연맹과 만국장로교연합총회에 제출하였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계에 나라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만든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1920년 6월에는 임시사료편찬회에서 수집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독립운동사략’ 상권을 발간하기도 했고, 상하이한인기독교회의 담임 목사로 활동하였으며, 대학적십자사의 상의원에 선출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상하인 한인의 교민단체인 대한거류민단의사회의 의원에도 역임하였습니다.

이후 김병조는 대한야소교진정회를 조직하여 대한민국 교회의 실정과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보내는 일을 하였고, 한인 교포 자녀들이 다니는 인성학교 교사에 임명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서간도에서 패왕조교회와 화전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대동역사’, ‘독립혈사’를 간행하였으며, 이후 ‘한족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1933년 4월 귀국하여 평안북도 용천군 동상교회 목사를 맡아보며 경신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고향인 정주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습니다.

김병조는 광복 이후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는데, 1946년 반공 운동을 벌인 혐의로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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