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문화원형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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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5월 11일 사이드뷰 시선에 포착된 인물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녹두장군 전봉준 선생입니다.

전봉준 선생은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하지만 어진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아버지 전창혁은 탐관오리였던 고부 군수 조병갑에게 반항하다 곤장을 맞아 세상을 떠났으며 전봉준 선생은 이로 인해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봉준 선생은30여 세에 동학에 몸을 담고 이후 고부 지방의 동학 접주가 되었습니다.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고 양민의 재산을 갈취하는 등 양민의 재산을 수탈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전봉준 선생은 농민 대표와 함께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이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를 습격하여 재산과 곡식을 배분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붙잡았습니다. 이 사태를 알게 된 조선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를 안핵사로 보내어 선처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용태가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리고 탄압을 시작하자 전봉준 선생은 다시 대규모의 봉기를 계획했습니다.

전봉준 선생은 동학교도와 농민 대중을 모아 군대를 편성하였고 '척왜ㆍ척양, 부패 관리 타파' 등의 강령을 내세워 관군을 무찔렀습니다. 동학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홍계훈 등을 대파하고 진군을 거듭해 음력 4월 28일에는 전주를 점령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중앙 정부에서는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할 것을 우려해 청나라 군대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여기에 일본군도 톈진조약을 들어 한반도에 진주하여 일촉즉발의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를 알게 된 동학군은 '불량한 양반의 죄를 조사하여 벌줄 것'과 '노비 문서를 소각할 것', '불법적인 세금을 없앨 것' 등의 내용을 담은 12개 조의 시정 요구책을 확약받고 휴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해체되었음에도 일본군과 청군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 땅에서 청일전쟁을 벌였으며,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처럼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숨기지 않는 일본에 격분하여 동학농민군은 재차 모여 봉기했으나, 이 항일 전쟁은 대부분의 농민군이 사살당하면서 대패로 끝이 났습니다.

이후 전봉준 선생은 은신하여 다시 거사를 일으키려고 준비하던 중 옛 부하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전봉준 선생은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기도 하지만 청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것을 평가하거나 민생, 국민의 이름을 앞세우면서 결국 국민을 고통스럽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장 오늘이 힘든 국민들의 생활을 안정화 시키고 미래의 청년, 아이들을 위한 새 정부의 현명한 정책을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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