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나무위키(독립운동가 김원봉)
출처 :나무위키(독립운동가 김원봉)

9월 28일 사이드뷰 시선에 포착된 인물은 독립운동가 김원봉입니다.

 

김원봉은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입니다.

독립운동가로서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많은 단원들의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통치기관 파괴 활동을 이끌었고,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진영 통합 운동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이 되어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일부 대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등으로 임명 받았습니다.

더불어, 그는 독립운동 노선에 있어서 무장투쟁 이외의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비판하면서 독립운동의 주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를 앞장서서 주장했지만, 때문에 우익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습니다.

또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혁명가 최창익, 김두봉 등과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을 벌였으며, 초기에는 좌익 독립운동 단체에서 의열단 활동을 한 김원봉이 압도적인 위세를 과시했으나 1940년 이후 공산주의자 최창익과 김두봉이 주도권을 잡으며 연안파가 탄생했습니다.

이후 김원봉은 연안파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말았습니다.

연안파에서 배제된 김원봉은 한때 반목했던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광복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결국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좌익 계열의 인민공화당을 이끄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남한 내의 좌익 계열 인사들과 단체들이 미군정과 우익 세력에 의해 화해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1948년에 월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북로당 계열로부터 ‘남조선 출신 비공산주의자’라는 지분으로 배려를 받아 초대 국가검열상이 되었으며, 1952년 5월 8일 국가검열성이 인민검열위원회로 개편됨에 따라 국가검열상에서 해임, 로동상으로 이임했습니다.

후임 인민검열위원장으로는 1953년 1월 23일, 리기석이 임명되었고, 전쟁에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노력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고 또 다시 로력훈장을 수여받았으나, 1958년 숙청되어 정치범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전문가들은 “김원봉의 거취에 따라 무장투쟁 세력들의 판도가 달라졌다”며 “그럼에도 무장투쟁활동 활약상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라고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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